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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노스탤지어를 비추는 그림
_정한조(미술평론)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19세기 기술 복제 시대에 들어 와 새로운 예술이 탄생하면서 전통적인 예술이 갖고 있던 아우라가 몰락했다고 말했다. 그는 사진, 영화와 같은 복제가 가능한 예술의 등장으로 예술이 이전의 전통 예술이 갖는 제의(祭儀)적 성격을 벗어나 순수하게 전시적 성격을 갖추게 되었다고 판단하고 그것을 새로운 예술 - 모더니즘 예술 - 의 시작으로 보았다.
그가 말한 ‘아우라의 몰락’은 아우라의 개별적, 심미적, 현실적 파편화로 설명될 수 있는 새로운 시대의 예술을 말하려 한 하나의 은유로서, 이는 시각과 지각의 변화임과 동시에 관념과 철학의 변화를 동반하는 가히 혁명적인 일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벤야민이 20세기 초에 했던 깜짝 놀랄만한 이 예언은 이후 그대로 실현된다.
최윤정의 그림을 아우라의 개념에 기대어 보면 그림의 깊숙한 곳까지 다다를 수 있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아우라는 분위기라는 말과 다르다는 점이다. 분위기는 이미지와 관련 있는 것으로,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이미지의 수사학(Rhetoric of the Image)」에서 밝혔듯이 다분히 ‘상투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상투성이란, 말 그대로 상투적이고 진부한, 일반적으로 코드화 되었다고 말하는 어떤 형식의 문제이며, 크고 무겁게 보면 정서적 이데올로기이다. 따라서 분위기는, 분위기에 휩싸인 코드화된 주체의 코드 풀기와 다름이 없다.
그러나 아우라는 코드화나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이 하나의 힘으로 작용한다. 아우라는 분위기에 휩싸인 주체의 상태에 전혀 개의치 않고 다가와 아우라만의 빛으로 주체를 밝힌다.
최윤정의 그림을 보면 이러한 사실들이 잘 드러나 있다. 먼저 파노라마 형식의 그림을 보자. 이젠 대중화된 파노라마 사진의 보급으로 이런 형식의 기형적인 장방형 프레임에 익숙해진 사람들이라도, 이 그림들 앞에서는 불편함을 호소할 수밖에 없다. 분위기 자체는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위기일 뿐이다 ; 원근법과는 관계없이 넓게 조망되기만 하는 풍경, 애매하게 활용되고 있는 색채, 비현실적인 장면, 상징적인 오브제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전해주는 코드화된 분위기. 우리는 이를 쉽게 ‘몽환적인 분위기’라고 말할 수 있고,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하나 분석했을 때의 상황이다. 한 눈에 통제되는 그림을 전체적으로 보면 시선을 어디에 고정해야 하고, 그래서 어디에서 어디로 옮겨가며 해석해야 하는지 모르는 불안함 때문에 낯선 장면으로만 비춰진다. 다시 말해 시각적으로는 가로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 같음에도, 심리적으로는 분절되어 보이는 것이다. 원근법으로 설명되는 듯 하면서도 평면성으로 막혀 버리고, 색채는 경계를 구분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순간에 흐려버리고, 현실적인 것 같지만 비현실적이고, 오브제를 통해 무언가 해석이 되는 듯하지만 더 이상의 의미는 생성이 안 되는, 이런 불편함의 연속이다.
실내의 모습을 360도로 한 바퀴 돌며 묘사한 전형적인 장방형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앞서 설명한 파노라마 형식의 그림보다는 눈에 잘 들어오고 좀 더 단정하게 정리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 느낌 역시 ‘분위기의 전형 - 실내의 전형, 오브제의 전형, 친숙한 것의 전형’ - 일 뿐이다. 사실 안정되고 차분한 색채로 그려져 잘 마무리되었다는 느낌만 날 뿐이지 그림의 구성 자체는 여전히 불안함을 내포한다. 시선을 어디에 두고 무엇을 봐야할지, 초점은 계속 흔들리기만 한다. 뿐만 아니라 친숙한 실내와 오브제 후면의 파란색 바다와 초록색으로 단조롭게 표현된 풍경은 시선과, 더 나아가 그림 자체를 분절시키며 파노라마 형식의 그림처럼 불편함을 준다.
최윤정의 그림은 바로 이 불편함에서 시작된다.
그림이 주는 불편함은 불쾌감과는 다르다. 그 불편함은 흔히 데자부(déjà vu)라고 말하는 기시감(旣視感)을 준다. 다시 말해 그림 속에 그려진 장면은 어디서 많이 본 듯 낯익지만(이 표현이 형식적인 유사성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는 점은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생각해 보면 결코 접한 적이 없는 장면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또 반대로 결코 접한 적이 없는 풍경임은 분명한데, 어딘지 낯익은 풍경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익숙한 분위기를 파악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불현듯 - 이 부사가 굉장히 중요하다 - 익숙한 분위기를 떠올리게 해 준다. 이러한 표현에 가장 적합한 용어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아우라이다. 개개인에게 빛으로 비춰지는, 개개인의 마음을 빛으로 비추는 그것.
나는 최윤정의 그림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잠재된 노스탤지어(nostalgia)를 비추고 있다고 본다. 노스탤지어는 좁은 의미로는 고향이나 지난 시절의 그리움을 뜻하는 것이겠지만, 넓게는 인간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그리움’, 그리고 그곳으로 향하는 마음을 뜻한다. 최윤정의 그림은 일상적이지만 어긋나고 엇갈린 그림의 코드와 평범하지만 결코 눈에 쉽게 소화되지 않는 시각적 장치들을 이용하여, 그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어디 있는지도 모르며, 왜 가려고 하는지도 모른 채 ‘막연히’ 가고 싶어 하는 향수를 어렵지 않게 끌어내는 동시에 그 근본적인 그리움으로 향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최윤정의 그림이 갖는 아우라이고, 그 아우라의 빛 한 가운데 최윤정의 그림이 있다.
과거 종교의 시대에 사람들은 성화를 ‘본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성인이나 천사의 머리에서 동그랗게 빛나는 빛으로, 그래서 그림 자체에서 나오는 빛으로 오히려 자기 자신의 모습이 비춰진다고 생각했다. 성화는, 그림은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을 위로하고, 절망하는 인간에게는 희망을 주고, 궁극적으로는 어둠 속에 한없이 놓여 있을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를 환하게 밝혀주는 빛이었다. 그 빛을 보고 느꼈기 때문에 눈에 익을 대로 익은 그림이지만 그 앞에서 꼼짝 없이 사로잡혀 그림을 응시할 뿐인 것이다.
현대에 들어서도 이 빛-아우라는 그 모습을 바꿨을 뿐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질 수가 없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최윤정의 그림들은, 화면 속의 친숙한 기호와 어떻게 보면 대중적인 코드에 기댄 듯한 형식적인 친근함에도 불구하고, 눈에 쉽게 소비되지 않는다. 휙휙 지나가며 볼 것 같은데, 그림 앞에 꼼짝 없이 서서 한동안 말없이 응시하게 된다. 아마도 우리 마음 속 어딘가에 아련히 존재하는 막연한 그리움, 그 노스탤지어를 환하게 비추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아우라를 우리들은 주저 없이 향유하기 때문일 것이다.